본문 바로가기
반응형

고려거란전쟁21

고려사로 미리보기, 1010년(현종 1년) 폭풍 같은 1009년이 지났습니다. 1010년, 과연 어떻게 펼쳐질지 지켜보시죠. 1010년(현종 2년) 7월, 가을 7월 무인 초하루 거란(契丹)이 급사중(給事中) 양병(梁炳)과 대장군(大將軍) 나율윤(那律允)을 보내 전왕(前王)의 사망에 대하여 물었다. 秋七月 戊寅朔 契丹遣給事中梁炳, 大將軍那律允, 來問前王之故. 1010년 8월, 8월 정미 초하루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진적(陳頔)과 직중대 상서우승(直中臺 尙書右丞) 윤여(尹餘)를 거란(契丹)에 보냈다. 八月 丁未朔 遣內史侍郞平章事陳頔, 直中臺尙書右丞尹餘如契丹. 1010년 9월, 9월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 김연보(金延保)를 거란(契丹)에 보내 가을철 안부를 물었으며, 좌사낭중(左司郞中) 왕좌섬(王佐暹)과 장작승(將作丞) 백일승(白日昇)을 거.. 2023. 11. 13.
고려사로 미리보기, 1009년(현종 즉위년) 1009년 2월, 목종이 시해되고 현종이 즉위했습니다. 일반적인 왕위 계승이 아닌지라 명분 싸움이 어떻게 벌어질지, 지켜볼까요 1009년(현종 즉위년) 2월, 이 달에 사농경(司農卿) 왕일경(王日卿)을 거란(契丹)에 보내 목종이 죽어 현종이 왕위를 계승하였음을 알렸다. 是月, 遣司農卿王日卿如契丹, 告哀稱嗣. 1009년 4월, 4월 병술 초하루 차공부시랑(借工部侍郞) 이유항(李有恒)을 거란(契丹)에 보내 태후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四月 丙戌朔 遣借工部侍郞李有恒如契丹, 賀太后生辰. 연초에 왕위 계승이 있었고, 이를 거란에 알렸다는 내용만 있습니다. 송나라에 알렸다는 내용은 없고요. 거란과의 관계를 평온하게 유지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볼 수 있습니다. 2023. 11. 13.
고려사로 미리보기, 1008~1009년(목종 11년~12년) 거란과의 전쟁 후 이미 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무래도 잊혀지고 있겠지요. 하지만 거란 전쟁과는 별개로 궁궐의 암투가 치열한데요, 이번에는 목종의 시해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 1009년(목종 12년) 1월, 1월부터 양산의 자루가 부러지거나 궁궐에 화재가 일어나는 등 흉흉한 모습이 포착되었습니다. 1009년 1월 16일 왕이 여러 날 몸이 편치 않자 늘 내전(內殿)에만 있으면서 여러 신하를 만나기 싫어하였다. 재신(宰臣)들이 매우 두려워하여 침전(寢殿)에 들어가서 문병하기를 요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왕은 채충순(蔡忠順)·최항(崔沆)과 더불어 몰래 후사(後嗣) 문제를 의논한 후 황보유의(皇甫兪義)를 보내 신혈사(神穴寺)에서 대량원군(大良院君)을 맞아오게 하였다. 서경도순검사(西京都.. 2023. 11. 13.
고려사로 미리보기, 1000~1007년(목종 3년~10년) 고려사의 사료가 부족한 것인지, 몇 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1000년부터 1006년까지는 큰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데요, 1007년 다시 기록이 보이니 다시 살펴보기로 하죠. 1007년(목종 10년) 2월, 〈정미〉10년(1007) 봄 2월 거란(契丹)이 야율연귀(耶律延貴)를 보내 왕에게 수의보방추성봉성공신 개부의동삼사 수상서령 (守義保邦推誠奉聖功臣 開府儀同三司 守尙書令) 겸 정사령 상주국(政事令 上柱國)을 더하여 책봉(冊封)하고, 식읍(食邑) 7,000호와 식실봉(食實封) 700호를 더하였다. (丁未)十年 春二月 契丹遣耶律延貴, 來加冊王, 爲守義保邦推誠奉聖功臣開府儀同三司守尙書令兼政事令上柱國, 食邑七千戶·食實封七百戶. 1007년에는 거란이 다시 왕의 작위를 더해 주었습니다. 계속해서 회유하는 모습을 보이는.. 2023. 11. 13.
고려사로 미리보기, 999년(목종 2년) 조용했던 몇 년 간이었습니다. 이제 10세기는 지나고 1000년의 11세기가 도래하는데요, (그 당시 사람들은 아니었겠지만) 10세기의 마지막 해, 999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었을까요? 999년(목종 2년) 10월, 거란이 우상시(右常侍) 유적(劉績)을 보내 왕에게 상서령(尙書令)을 더하여 책봉(冊封)하였다. 契丹遣右常侍劉績, 來加冊王尙書令. 송(宋)에 이부시랑(吏部侍郞) 주인소(朱仁紹)를 보내자 〈송의〉 황제가 특별히 그를 불러 보았다. 주인소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의 문화[華風]를 사모하고 있으며 거란(契丹)이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 되었음을 알렸다. 황제가 조서(詔書)를 내리니 받아서 돌아왔다. 遣吏部侍郞朱仁紹如宋, 帝特召見. 仁紹自陳國人思慕華風, 爲契丹劫制之狀. 帝賜詔, 齎還. 999년에는 거란.. 2023. 11. 13.
고려사 미리보기, 998년(목종 1년) 997년에 목종이 즉위하였죠. 998년은 목종이 본격적으로 왕의 역할을 수행한 때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998년에 고려와 거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998년(목종 1년) 4월, 이 달에 거란(契丹)은 전왕(前王)이 죽었다는 이유로 칙명(勅命)을 보내 전에 받았던 폐백(幣帛)을 돌려주었다. 是月契丹以前王薨, 勑還納幣之物. 역사서에는 크게 나타나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998년 7월, 외교 담판의 주역 서희가 사망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목종은 부의 명목으로 베 1,000필 대맥 300석 쌀 500석 뇌원차 200각 대차 10근 단향 300냥을 보냈다고 하니, 그 지위를 유추할 수 있겠습니다. 2023. 11. 12.
고려사로 미리보기, 997년(성종 16년, 목종 즉위년) 왕위 책봉한 다음해가 되었습니다. 성종은 병이 들어 훙(薨)하였고, 그 다음으로 목종이 즉위했습니다. 이 해의 성종 시기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997년(목종 즉위년) 11월 〈정유(997)〉11월 합문사(閤門使) 왕동영(王同穎)을 거란(契丹)에 보내 왕위 계승을 통보하였다. (丁酉)十一月 遣閤門使王同穎如契丹, 告嗣位. 997년, 12월 이 달에 거란(契丹)이 천우위 대장군(千牛衛大將軍) 야율적열(耶律迪烈)을 보내 〈성종(成宗)의 생일인〉 천추절(千秋節)을 축하하자, 왕이 그 명(命)을 맞이하여 성종의 재궁(梓宮) 앞에서 고하였다. 是月, 契丹遣千牛衛大將軍耶律迪烈, 來賀千秋節, 王迎命, 告于成宗柩前. 1차 전쟁으로부터 4년째 되는 해입니다. 그 사이 성종이 붕어하고, 목종이 즉위했습니다. 거란에.. 2023. 11. 12.
고려사로 미리보기, 996년(성종 15년) 외교 활동이 한창인 995년이었는데요, 996년에는 고려와 거란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봅시다. 996년(성종 15년) 3월, 〈병신〉15년(996) 봄 3월 거란(契丹)이 한림학사(翰林學士) 장간(張幹)과 충정군절도사(忠正軍節度使) 소숙갈(蕭熟葛)을 보내 왕을 책봉(冊封)하며 말하기를, “한(漢)은 호한(呼韓)을 중히 여겨 그 지위를 열후(列侯)나 왕의 위에 두었고, 주(周)는 웅역(熊繹)을 존중하여 대대로 땅을 봉하였다. 내가 옛날을 본받아 임금이 되어 먼 나라에까지 은혜를 넓히려고 한다. 동쪽 바다 저 바깥에 있으며 북극(北極)에 순응하여 와서 왕이 되어 세월이 여러 번 옮겨가도 산 넘고 물 건너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실제로 책봉하는 의례(儀禮)를 거행하여 내부(內附)해 온 .. 2023. 11. 12.
고려사로 미리보기, 995년(성종 14년) 994년에는 전후 처리와 외교 작업이 한창이었는데요, 그 다음해인 995년에는 거란과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살펴봅시다. 995년(성종 14년) 2월, 이 달에 이주정(李周禎)을 거란(契丹)에 보내 방물을 바쳤으며, 또 매를 바쳤다 是月, 遣李周禎如契丹, 獻方物. 又進鷹. 995년 미상, 이 해에 이지백(李知白)을 거란(契丹)에 보내 방물을 바쳤다. 是歲, 遣李知白如契丹, 獻方物. 어린 아이 10인을 거란(契丹)에 보내 거란어를 익히게 하였다. 遣童子十人於契丹, 習其語. 좌승선(左承宣) 조지린(趙之遴)을 거란(契丹)에 보내 청혼(請婚)하니, 〈거란 황제가〉 동경유수(東京留守) 부마(駙馬) 소항덕(蕭恒德)의 딸이 혼인할 것을 허락하였다. 遣左承宣趙之遴如契丹, 請婚, 以東京留守駙馬蕭恒德女, 許嫁. 995년은.. 2023. 11. 12.
고려사로 내용 살피기 (2) 994년 어제 993년(성종 12년) 고려사의 거란 전쟁 부분을 살펴보았는데요, 서희의 열전에 나온 형태처럼 큰 피해 없이 마무리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다음해에는 어떻게 거란과의 관계가 지속되었을까요? 994년(성종 13년) 2월, 〈갑오〉13년(994) 봄 2월 소손녕(蕭遜寧)이 글을 보내 이르기를, “요즈음 받든 우리 황제의 명령[宣命]에 말씀하시길, ‘다만 고려(高麗)와는 좋은 우호관계가 일찍부터 통하였고 국경이 서로 맞닿았다. 비록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김(事大)에 진실로 합당한 규범과 의례가 있지만, 그 처음과 끝을 살펴본다면 모름지기 오래도록 〈우호관계를〉 남겨야 한다. 만약 미리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사신의 〈길이〉 도중에 막힐까 걱정이다. 따라서 고려와 서로 상의하여 길의 요충지에 성곽과.. 2023. 11. 12.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