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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21

고려사로 고려거란전쟁 미리보기, 1020년(현종 11년) 귀주대첩의 승리로 이끈 1019년, 전후 처리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보고, 고려거란전쟁 편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1020년(현종 11년) 2월, 이 달에 이작인(李作仁)이 표문(表文)을 받들고 거란(契丹)에 가서 번국(藩國)이라 칭하며 공물(貢物) 바치기를 예전처럼 할 것을 청하고, 또 구속되어 있던 거란인(契丹人) 지라리(只刺[剌]里)를 돌려보낼 것을 (알렸는데, 그는) 억류된 지 무려 6년이었다. 是月, 遣李作仁奉表如契丹, 請稱藩納貢如故, 且歸所拘人只刺里, 被留凡六年. 1020년 3월 2일, 3월 계축 거란(契丹)의 사신 야율행평(耶律行平)을 돌려보냈다. 三月 癸丑 歸契丹使耶律行平. 1020년 3월 8일, 기미 거란(契丹)에서 사신 검교사도(檢校司徒) 한소옹(韓紹雍)이 왔다. 己未 契丹使檢校司徒.. 2023. 11. 20.
고려사로 고려거란전쟁 미리보기 1019년(현종 10년) 소손녕과 10만 대군을 앞세워 진격한 거란군. 이에 맞서는 강감찬과 고려군. 한 차례 맞부딪힌 후 다시 1019년에는 어떤 양상으로 펼쳐질까요? 1019년(현종 10년) 1월 3일, 기미 10년(1019) 봄 정월 신유 소손녕(蕭遜寧)이 신은현(新恩縣)에 이르렀는데, 개경(京城)과의 거리가 1백 리(里)였다. 왕이 성 밖의 백성들을 거두어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청야(淸野) 전술로 〈거란군을〉 대비하였다. 소손녕이 보낸 야율호덕(耶律好德)이 서신을 가지고 통덕문(通德門)에 이르러 군대를 돌리겠다고 아뢰었다. 몰래 정찰 기병 3백 여 명을 보내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는데, 우리가 보낸 군사 1백 명이 밤을 틈타 엄습하여 죽였다. 己未 十年 春正月 辛酉 蕭遜寧至新恩縣, 去京城百里. 王命收城外民戶入內, 淸.. 2023. 11. 17.
고려사로 고려거란전쟁 미리보기, 1018년(현종 9년) 거란의 흥화진 침입한지 몇 개월, 해는 또 바뀌어 1018년이 밝았습니다. 1018년은 알고 계시겠지만 거란과의 혈투를 벌인 해이기도 합니다. 자 지켜봅시다. 1018년(현종 9년) 5월 18일, 기묘 강감찬(姜邯贊)을 서경유수 내사시랑평장사(西京留守 內史侍郞平章事)로, 양전(梁稹)을 예부상서 겸 중추사(禮部尙書 兼 中樞使)로 임명하고, 이공(李龔)을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 承旨)로, 서눌(徐訥)을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임명하였다. 己卯 以姜邯贊爲西京留守內史侍郞平章事, 梁稹爲禮部尙書兼中樞使, 李龔爲翰林學士承旨, 徐訥爲左諫議大夫. 1018년 10월 19일, 무신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강감찬(姜邯贊)을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임명하였다. 戊申 以內史侍郞平章事姜邯贊爲西北面行營都統使. 1.. 2023. 11. 16.
고려사로 고려거란전쟁 미리보기, 1017년(현종 8년) 거란과의 관계가 악화일로에 치닫고 있는 1016년을 지나 새로운 해가 밝았습니다. 과연 1017년에는 어떤 일이 고려와 거란 사이에 있었을까요? 1017년(현종 8년) 8월 28일, 계사 거란(契丹)의 소합탁(蕭合卓)이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여 공격하였으나 9일 동안 이기지 못하였다. 장군 견일(堅一)·홍광(洪光)·고의(高義)가 출전(出戰)하여 그들을 크게 격파하고 목 베고 획득한 것이 많았다. 흥화진은 고려와 거란의 주된 전장터였나 봅니다. 다행히 1017년에도 흥화진을 잘 지켜내었고요. 거란의 몇 사람이 고려에 투항한 것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긴장감이 흐르는 한 해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2023. 11. 16.
고려사로 고려거란전쟁 미리보기, 1016년(현종 7년) 거란의 침공이 시작된 1015년, 어찌어찌 막아냈지만 더 큰 위기가 다가오는 듯한 1016년이 밝았습니다. 1016년(현종 7년) 1월 5일, 병진 7년(1016) 봄 정월 경술 거란(契丹)의 야율세량(耶律世良)과 소굴열(蕭屈烈)이 곽주(郭州)를 침략하자, 우리 군대가 맞서 싸우다 죽은 자가 수만 명이었으며 〈거란군은〉 군수품을 탈취하여 돌아갔다. 丙辰七年 春正月 庚戌 契丹耶律世良·蕭屈烈侵郭州, 我軍與戰, 死者數萬人, 獲輜重而歸. 1016년 1월 9일, 갑인 거란(契丹)의 사신 10인이 압록강에 도달하자 받아들이지 않았다. 甲寅 契丹使十人到鴨綠江, 不納. 1월부터 거란이 곽주를 침공하는 등 대대적인 움직임이 있을 듯하였으나 1월이 지나자 큰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다만 수시로 거란인들의 투항이 있었습니다만.. 2023. 11. 16.
고려사로 고려거란전쟁 미리보기, 1015년(현종 6년) 거란이 침공하였다가 격퇴당한 1015년을 지나 1016의 해가 밝았습니다.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거란. 어떤 한 해가 펼쳐질지 지켜봅시다. 1015년(현종 6년) 1월 23일, 갑진 〈거란군(契丹兵)이〉 또 통주(通州)를 침략하였다. 甲辰 又侵通州. 1015년 1월, 을묘 6년(1015) 봄 정월 거란(契丹)이 압록강(鴨綠江)에 다리를 만들고, 다리를 끼고 동쪽과 서쪽에 성을 쌓았는데, 〈고려(高麗)에서〉 장수를 보내 공격하여 파괴하려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乙卯六年 春正月 契丹作橋於鴨綠江, 夾橋築東西城, 遣將攻破, 不克. 1015년 3월 19일, 기해 거란(契丹)이 용주(龍州)를 침략하였다. 己亥 契丹侵龍州. 1015년 4월 11일, 여름 4월 경신 거란(契丹)의 사신 장군 야율행평(耶律行平)이 와.. 2023. 11. 16.
고려사로 고려거란전쟁 미리보기, 1014년(현종 5년) 거란이 6성을 요구한 1013년을 지나, 새로운 1014년 해가 밝았습니다. 거란이 6성 요구를 거절한 고려를 그대로 넘길지, 또 다른 침략을 할지 지켜보도록 합시다. 1014년(현종 5년) 8월 11일, 8월 갑자 내사사인(內史舍人) 윤징고(尹徵古)를 송(宋)에 보내 금실로 짜서 만든 용 봉황 무늬의 안복(鞍幞)과 수를 놓은 용 봉황 무늬의 안복 각각 2벌과 좋은 말 22필을 바치고 예전처럼 귀부하기를 거듭 요청하였다. 송 황제가 등주(登州)에 조서(詔書)를 내려 말하기를, “바닷가 선착장에 관(館)을 설치하여 모시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八月 甲子 遣內史舍人尹徵古如宋, 獻金線織成龍鳳鞍幞, 繡龍鳳鞍幞各二, 良馬二十二匹, 仍請歸附如舊. 宋帝詔登州, "置館于海次, 以侍之.” 1014년 9월 13일, 병신.. 2023. 11. 16.
고려사로 고려거란전쟁 미리보기, 1013년(현종 3년) 1012년에는 거란이 입조를 요청하였으나 고려에서 거절하는 일이 있었는데요. 1013년에는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지켜봅시다. 1013년(현종 3년) 1월, 경인 중추원사(中樞院使) 채충순(蔡忠順)을 거란(契丹)에 보냈다. 庚寅 遣中樞院使蔡忠順如契丹. 1013년 1월 5일, 계축 4년(1013) 봄 정월 정유 예빈소경(禮賓少卿) 장계(張洎)를 거란(契丹)에 보냈다. 癸丑 四年 春正月 丁酉 遣禮賓少卿張洎如契丹. 1013년 3월 17일, 무인 거란(契丹)에서 사신 좌감문위 대장군(左監門衛 大將軍) 야율행평(耶律行平)이 와서 흥화(興化) 등 6개 성을 빼앗은 것을 질책하였다. 戊申 契丹使左監門衛大將軍耶律行平來, 責取興化等六城. 1013년 5월 7일, 5월 정유 거란(契丹)이 사신을 보내 연호(年號)를 통화(.. 2023. 11. 15.
고려사로 미리보기, 1012년(현종 3년) 1011년 거란이 물러가고 겨우 개경에 환궁한 현종, 그의 앞에 펼쳐진 고려의 앞날은 어떠할까요? 1012년(현종 3년) 4월, 거란(契丹)이 왕의 친조(親朝)를 명하는 조서를 보냈다. 契丹詔王親朝. 1012년 6월 28일, 갑자 형부시랑(刑部侍郞) 전공지(田拱之)를 거란(契丹)에 보내 여름철 안부를 묻고, 또 왕이 병이 나서 친조(親朝)하지 못함을 알렸다. 거란주(契丹主)가 분노하여 조서(詔書)를 내리기를, 흥화(興化)·통주(通州)·용주(龍州)·철주(鐵州)·곽주(郭州)·귀주(龜州) 등 6개 성을 빼앗으라고 하였다. 甲子 遣刑部侍郞田拱之如契丹, 夏季問候, 且告王病, 不能親朝. 丹主怒, 詔取興化·通州·龍州·鐵州·郭州·龜州等六城. 1012년 9월 4일, 9월 기사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 문유령(文儒領)을 거.. 2023. 11. 15.
고려사로 미리보기, 1011년(현종 2년) 거란의 침공이 시작한 1010년, 왕이 피난을 갈 정도였는데요. 그 다음해는 어떨지 살펴봅시다. 1011년(현종 2년) 1월 1일, 신해 2년(1011) 봄 정월 을해 초하루 거란주(契丹主)가 개경(開京)에 들어가 태묘(大廟), 궁궐, 민가(民家)를 불살라서 모두 탔다. 이 날 왕은 광주(廣州)에 묵었다. 辛亥二年 春正月 乙亥朔 契丹主入京城, 焚燒太廟·宮闕·民屋皆盡. 是日, 王次廣州. 1011년 1월 3일, 정축 왕을 호종하던 여러 신하가 하공진(河拱辰) 등이 잡혔다는 것을 듣고 모두 놀라고 두려워 뿔뿔이 도망쳤으며, 오직 시랑(侍郞) 충숙(忠肅), 장연우(張延祐), 채충순(蔡忠順), 주저(周佇), 유종(柳宗), 김응인(金應仁)만이 떠나지 않았다. 丁丑 扈從諸臣, 聞拱辰等被執, 皆驚懼散走, 惟侍郞忠肅·張.. 2023.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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