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성 전투 이후
몽골 사신의 무례한 태도가 있었는데요,
1220년은 몽골과의 관계는 무탈하게 지나갔고,
1221년은 몽골과의 갈등이 본격화되는 것 같습니다.
1221년 8월 8일,
기미 몽골 사신 저고여(著古與) 등 13명과 동진(東眞) 사람 8명 및 부녀자 1명이 왔다.
己未 蒙古使著古與等十三人·東眞八人, 幷婦女一人來.
1221년 9월 1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보고하기를, “또 몽골 사신 저가(這可) 등이 옵니다.”라고 하였다.
東北面兵馬使報, “又有蒙古使這可等來.”
1221년 9월 6일,
정해 왕이 4품 이상의 여러 신하들을 대관전(大觀殿)에 소집하여 뒤에 오는 몽골 사신 영접에 대한 가부를 물었다. 왕은 대비를 한 뒤에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모두 아뢰기를, “저들은 수가 많고 우리는 부족한데, 만약 영접하지 않는다면 저들은 반드시 쳐들어올 것입니다. 어찌 적은 수로 많은 수를 대적할 수 있겠으며 약자가 강자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丁亥 王召群臣四品以上於大觀殿, 問蒙古後使迎接可否. 王欲設備, 拒而不納, 群臣皆曰, “彼衆我寡, 若不迎接, 彼必來侵. 豈可以寡敵衆, 以弱敵强乎?” 王不悅.
1221년 9월 10일,
신묘 의주분도장군(義州分道將軍)이 급히 보고[馳報]하기를, “〈몽골〉군 6,000~7,000명이 와서 파속로(婆速路) 석성(石城) 옆에 진을 쳤습니다.”라고 하였다.
辛卯 義州分道將軍馳報, “有兵六七千, 來屯婆速路石城旁.”
1221년 9월 12일,
계사 몽골사신 저가(這可) 등 23명과 부녀 1명이 와서 나라의 예물[國贐]을 바치라고 독촉하였다.
癸巳 蒙古使這可等二十三人, 幷婦女一人, 來督國贐.
1221년 10월 5일,
을묘 몽골 사신 희속불화(喜速不花, 코스부카) 등 7명이 왔다.
乙卯 蒙古使喜速不花等七人來.
1221년 10월 10일,
갑신 왕이 대관전(大觀殿)에서 몽골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庚申 王宴蒙使于大觀殿.
1221년 12월,
12월 임진 몽골 사신 3명과 동진(東眞)인 17명이 왔다.
十二月 壬辰 蒙古使三人·東眞十七人來.
하루가 멀다 하고 사신을 보내오는 몽골.
그리고 무력 시위를 같이 하면서 산물을 계속 바치라고 압박하는군요.
가뜩이나 계속된 전쟁으로 국고는 고갈되었을텐데,
애꿎은 백성들만 피해를 보았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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