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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지의 도서 생활/세지와 고전 읽기

고려사로 보는 고려 몽골 전쟁, 1218년~1219년(고종 5년~6년)

by 세지_Seji 2023.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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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거란 전쟁을 다루다가

그렇다면 고려 몽골 전쟁은 어떤 양상이었는지

원문을 통해 알아보고 싶어서 이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직접적인 원인은 1225년이라고 하지만,

그 전에 몽골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부터 보기 위해 1218년을 골랐습니다.

 

 

1218년 12월 1일,

12월 기해 초하루 몽골(蒙古)의 원수(元帥) 합진(哈眞, 카치운)과 찰랄(札剌, 차라)이 군사 10,000명을 거느리고 동진국(東眞國)의 포선만노(浦鮮萬奴)가 파견한 완안자연(完顔子淵)의 군사 20,000명과 함께 거란적[丹賊]을 토벌하겠다고 말하면서[聲言] 화주(和州), 맹주(猛州), 순주(順州), 덕주(德州)의 4개 성(城)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곧바로 강동성(江東城)으로 향하였다.

十二月 己亥朔 蒙古元帥哈眞札剌, 率兵一萬, 與東眞萬奴所遣完顔子淵兵二萬, 聲言討丹賊, 攻···四城, 破之, 直指江東城.

 

 

1219년 1월 14일,

〈기묘〉 6년(1219) 봄 정월 신사 조충(趙冲)과 김취려(金就礪)가 합진(哈眞, 카치운) 및 완안자연(完顔子淵) 등과 함께 병사를 합하여 강동성(江東城)을 포위하니 적들이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였다.

(己卯)六年 春正月 辛巳 趙冲·金就礪, 與哈眞·子淵等, 合兵, 圍江東城, 賊開門出降.

 

 

1219년 1월 23일,

경인 합진(哈眞, 카치운)이 포리대완(蒲里帒完) 등 10명에게 조서(詔書)를 가지고 와서 강화맺기를 청하였다. 왕이 시어사(侍御史) 박시윤(朴時允)을 파견하여 그들을 맞이하고, 문무관료에게 관복을 갖추어 입고 선의문(宣義門)에서부터 십자가(十字街)에 이르기까지 좌우로 나누어 도열하라고 명령하였다. 포리대완 등이 객관 밖에까지 도착해서는 지체하면서 들어오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국왕이 나와 맞이하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이에 역관(譯官)을 시켜 두세 차례 말을 했더니, 그제야 말을 타고 관문(館門)으로 들어왔다.

庚寅 哈眞蒲里帒完等十人賫詔, 來請講和. 王遣侍御史朴時允迎之, 命文武官具冠帶, 自宣義門, 至十字街, 分立左右. 蒲里帒完等至館外, 遲留不入曰, “國王須出迎.” 於是, 使譯者, 再三詰之, 遂乘馬入館門.

 

 

1219년 1월 24일,

신묘 대관전(大觀殿)에서 〈몽골 사신을〉 접견하였다. 〈몽골 사신은〉 모두 털옷과 털모자 차림에 활과 화살을 차고 곧바로 대관전에 올라서, 품에서 편지를 꺼내어 왕의 손을 잡고 주려 하였다. 왕의 안색이 변하고 좌우의 신하들은 허둥거릴 뿐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었다. 시신(侍臣) 최선단(崔先旦)이 울면서 말하기를, “어찌 흉한 오랑캐가 지존께 가까이 가는가? 설령 형가(荊軻)의 변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라고 하고, 마침내 나가달라고 요청하였다. 포리대완(蒲里帒完) 등이 우리나라의 의관으로 갈아입고 대관전에 들어와 약식으로 인사를 하는데[私禮], 읍(揖)만 할 뿐 절을 하지 않았다. 〈몽골 사신 포리대완 등이〉 돌아갈 때에 금은 그릇[金銀器], 명주와 베[紬布], 수달피(水獺皮)를 차등있게 주었다.

辛卯 王引見于大觀殿, 皆毛衣冠, 佩弓矢, 直上殿, 出懷中書, 執王手, 授之. 王乃變色, 左右遑遽, 莫敢近, 侍臣崔先旦泣曰, “豈可使醜虜, 近至尊耶? 設有荊軻之變, 必不及矣.” 遂請出, 蒲里帒完等更服我國衣冠入殿, 行私禮, 但揖而不拜. 及還, 贈金銀器·紬布·水懶皮, 有差.

 

 

1219년 2월 22일,

2월 기미 합진(哈眞, 카치운) 등이 돌아갔는데, 동진(東眞)의 관인(官人)과 겸종(傔從) 41명은 의주(義州)에 남겨두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고려말을 배우면서 내가 다시 올 때를 기다리라.”라고 하였다.

二月 己未 哈眞等還, 以東眞官人及傔從四十一人, 留義州曰, “爾等習高麗語, 以待吾復來.”

 

 

1219년 8월 29일,

임진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보고하기를, “몽골과 동진국(東眞國)이 군사를 보내어 진명성(鎭溟城) 밖에 진을 치고는 세공(歲貢)을 바치라고 독촉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壬辰 東北面兵馬使報云, “蒙古與東眞國遣兵, 來屯鎭溟城外, 督納歲貢.”

 

 

1219년 9월 9일,

9월 신축 몽골 사신 11명과 동진국(東眞國) 사람 9명이 왔다.

九月 辛丑 蒙古使十一人, 東眞國九人來.

 

 

 

거란의 잔당을 처리한 강동성 전투에서고려와 몽골 그리고 여진족의 동진국의 연합을 보여 주었는데요,몽골의 사신은 무례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당시 강대한 힘을 보여 주고 있던 몽골이라 그런지고려도 맥을 못 추는 모습입니다(그 전에 계속된 전쟁으로 국력이 남아나지도 않았겠지만요)

 

어쨌든 1218년, 1219년은 불안한 긴장감 속에 흘러갔습니다.앞으로 어떻게 될지, 지켜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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