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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지의 도서 생활/세지와 고전 읽기

고려사로 고려거란전쟁 미리보기, 1018년(현종 9년)

by 세지_Seji 2023.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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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흥화진 침입한지 몇 개월, 해는 또 바뀌어 1018년이 밝았습니다.

1018년은 알고 계시겠지만 거란과의 혈투를 벌인 해이기도 합니다.

자 지켜봅시다.

 

 

1018년(현종 9년) 5월 18일,

기묘 강감찬(姜邯贊)을 서경유수 내사시랑평장사(西京留守 內史侍郞平章事)로, 양전(梁稹)을 예부상서 겸 중추사(禮部尙書 兼 中樞使)로 임명하고, 이공(李龔)을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 承旨)로, 서눌(徐訥)을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임명하였다.

己卯 以姜邯贊西京留守內史侍郞平章事, 梁稹禮部尙書中樞使, 李龔翰林學士承旨, 徐訥左諫議大夫.

 

 

1018년 10월 19일,

무신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강감찬(姜邯贊)을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임명하였다.

戊申 以內史侍郞平章事姜邯贊西北面行營都統使.

 

 

1018년 12월 10일,

무술 거란(契丹)의 소손녕(蕭遜寧)이 군대 10만을 이끌고 침입하자, 왕이 평장사(平章事)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上元帥)로 임명하고 대장군(大將軍) 강민첨(姜民瞻)이 보좌하게 하였다. 상원수의 군대가 흥화진(興化鎭)에 이르러 〈거란군을〉 크게 무찌르자, 소손녕이 군대를 이끌고 곧장 개경(京城)으로 진격하였다. 강민첨이 추격하여 자주(慈州)에서 만나 또 크게 무찔렀다.

戊戌 契丹蕭遜寧以兵十萬來侵, 王以平章事姜邯贊上元帥, 大將軍姜民瞻副之. 帥兵至興化鎭, 大敗之, 遜寧引兵直趨京城. 民瞻追及於慈州, 又大敗之.

 

 

거란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워서 그런지

1018년에는 강감찬의 관직 임명에 대한 내용이 두 번이나 실렸습니다.

소손녕과 강감찬의 전투. 왕실의 내용에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강감찬 열전을 찾아보았습니다. 전투는 다음해까지 이어지므로, 그 전까지의 내용만 다루었고

나머지는 1019년에 다루겠습니다.

 

 

강감찬 열전 증 일부,

 

 

거란(契丹)의 소손녕(蕭遜寧)이 침입하니, 병사가 100,000명이라 하였다. 당시 강감찬(姜邯贊)은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가 되었는데, 왕은 그를 상원수(上元帥)로 임명하였고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하였으며, 내사사인(內史舍人) 박종검(朴從儉)과 병부낭중(兵部郞中) 유참(柳參)을 판관(判官)으로 삼아 군사 208,300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에 주둔하게 하였다. 흥화진(興化鎭)에 이르러 기병 12,000명을 뽑아 산골짜기에 매복시킨 후에, 큰 동아줄을 소가죽에 꿰어서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고 그들을 기다렸다. 적들이 오자 막아 놓았던 물줄기를 터놓고 복병을 돌격시켜 크게 패배시켰다. 소손녕이 군사를 이끌고 바로 개경으로 진격하자, 강민첨은 자주(慈州)의 내구산(來口山)까지 쫓아가서 다시 크게 패배시켰다. 시랑(侍郞) 조원(趙元)은 또 마탄(馬灘)에서 공격하여 목 벤 것이 10,000여 급(級)이었다.
契丹蕭遜寧來侵, 兵號十萬. 時邯贊西北面行營都統使, 王仍命爲上元帥, 大將軍姜民瞻副之, 內史舍人朴從儉·兵部郞中柳參判官, 帥兵二十萬八千三百, 屯寧州. 至興化鎭, 選騎兵萬二千, 伏山谷中, 以大蠅貫牛皮, 塞城東大川, 以待之. 賊至, 決塞發伏, 大敗之. 遜寧引兵, 直趍京城, 民瞻追及於慈州來口山, 又大敗之. 侍郞趙元, 又擊於馬灘, 斬首萬餘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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