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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지의 도서 생활/세지와 고전 읽기

고려사로 고려거란전쟁 미리보기 1019년(현종 10년)

by 세지_Seji 2023.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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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손녕과 10만 대군을 앞세워 진격한 거란군.

이에 맞서는 강감찬과 고려군. 한 차례 맞부딪힌 후 다시 1019년에는 어떤 양상으로 펼쳐질까요?

 

 

1019년(현종 10년) 1월 3일,

기미 10년(1019) 봄 정월 신유 소손녕(蕭遜寧)이 신은현(新恩縣)에 이르렀는데, 개경(京城)과의 거리가 1백 리(里)였다. 왕이 성 밖의 백성들을 거두어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청야(淸野) 전술로 〈거란군을〉 대비하였다. 소손녕이 보낸 야율호덕(耶律好德)이 서신을 가지고 통덕문(通德門)에 이르러 군대를 돌리겠다고 아뢰었다. 몰래 정찰 기병 3백 여 명을 보내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는데, 우리가 보낸 군사 1백 명이 밤을 틈타 엄습하여 죽였다.

己未 十年 春正月 辛酉 蕭遜寧新恩縣, 去京城百里. 王命收城外民戶入內, 淸野以待. 遜寧耶律好德賫書, 至通德門, 告以回軍. 潛遣候騎三百餘, 至金郊驛, 我遣兵一百, 乘夜掩殺之.

 

 

1019년 2월 1일,

2월 기축 초하루 거란군[丹兵]이 귀주(龜州)를 지나가는데, 강감찬(姜邯贊) 등이 맞아 싸워 크게 무찔러서 살아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었다.

二月 己丑朔 丹兵過龜州, 邯贊等邀戰, 大敗之, 生還者僅數千人.

 

 

1019년 2월 6일,

갑오 강감찬(姜邯贊)이 개선(凱旋)하여 돌아오자, 왕이 친히 영파역(迎波驛)에서 맞이하였다.

甲午 姜邯贊凱還, 王親迎于迎波驛.

 

 

1019년 5월 12일,

무진 거란(契丹) 동경(東京)의 문적원소감(文籍院少監) 오장공(烏長公)이 와서 왕을 알현하였다.

戊辰 契丹東京文籍院少監烏長公來見.

 

 

1019년 8월 7일,

신묘 거란(契丹) 동경(東京)에서 사신 공부소경(工部少卿) 고응수(高應壽)가 왔다.

辛卯 契丹東京使工部少卿高應壽來.

 

 

1019년 8월 11일,

을미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郞) 이인택(李仁澤)을 거란(契丹) 동경(東京)에 보냈다.

乙未 遣考功員外郞李仁澤如契丹東京.

 

 

유명한 귀주대첩의 해입니다.

10만 명 정도가 침입해 왔는데 돌아가는 이가 수천뿐이라고 하였으니

억울한 원혼들에게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만, 승리한 것은 축하할 법 하지요.

 

 

강감찬 열전을 연이어 봅시다.

 

강감찬은 거란군이 개경 가까이 오자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金宗鉉)으로 하여금 병사 10,000명을 거느려 급히 〈개경으로〉 들어가 수비하게 하고,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역시 군사 3,300명을 원군으로 보냈다. 이에 거란이 군사를 돌려서 연주(漣州)·위주(渭州)에 이르자, 강감찬 등이 기습하여 500여 급을 목 베었다. 2월에는 거란군이 귀주(龜州)를 통과하자 강감찬 등이 동쪽 교외에서 맞아 싸우니, 양쪽 군사들이 서로 대치하며 승패를 결정짓지 못하였다. 김종현이 군사를 인솔해 그곳에 이르니, 갑자기 비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와서 깃발이 북쪽을 가리켰다. 아군이 그 기세를 타고 용기백배하여 격렬히 공격하니, 거란 군사들이 북으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아군이 그들을 추격하여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렀는데, 시체가 들을 덮었고 사로잡은 포로, 노획한 말과 낙타, 갑옷, 병장기를 다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었으니, 거란의 패배가 이토록 심한 적은 없었다. 거란의 왕이 패전 소식을 듣고 대노하여, 사자를 소손녕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네가 적을 얕잡아보고 적국 깊이 들어가 이런 지경이 되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보려는가? 짐은 너의 얼굴 가죽을 벗기고, 그런 후에 죽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강감찬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개선하여 포로와 노획물을 바치니, 왕은 친히 영파역(迎波驛)까지 나와 영접하였다. 비단을 누각에 묶고 풍악을 준비하여 장군과 병사들을 위해 잔치를 열었고, 금으로 만든 꽃 8가지를 몸소 강감찬의 머리에 꽂아주었다. 왕이 왼손으로 〈강감찬의〉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술잔을 잡고서 위로와 감탄의 말을 그치지 않으니, 강감찬은 감당할 수 없다며 사의를 표하였다. 드디어 역의 이름을 흥의역(興義驛)으로 고쳤고, 역리(驛吏)들에게 관대를 하사하여 주리(州吏)·현리(縣吏)와 같게 하였다.

 

 

귀주에서 대규모 회전으로 거란군을 물리친 것을 보면,

고려도 강력한 기병대를 갖춘 국가였거나 기병대를 제압할 수 있는 역량이 있어 보입니다.

어쨌든 대규모 침공을 잘 막아내고, 전후 처리에 대한 논의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사신들이 오가는 것을 보면 어떠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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