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지의 도서 생활/세지와 고전 읽기

고려사로 내용 살피기 (2) 994년

by 세지_Seji 2023. 11. 12.
반응형

어제 993년(성종 12년) 고려사의 거란 전쟁 부분을 살펴보았는데요,

서희의 열전에 나온 형태처럼 큰 피해 없이 마무리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다음해에는 어떻게 거란과의 관계가 지속되었을까요?

 

994년(성종 13년) 2월,

〈갑오〉13년(994) 봄 2월 소손녕(蕭遜寧)이 글을 보내 이르기를,
“요즈음 받든 우리 황제의 명령[宣命]에 말씀하시길, ‘다만 고려(高麗)와는 좋은 우호관계가 일찍부터 통하였고 국경이 서로 맞닿았다. 비록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김(事大)에 진실로 합당한 규범과 의례가 있지만, 그 처음과 끝을 살펴본다면 모름지기 오래도록 〈우호관계를〉 남겨야 한다. 만약 미리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사신의 〈길이〉 도중에 막힐까 걱정이다. 따라서 고려와 서로 상의하여 길의 요충지에 성곽과 해자를 쌓아 만들도록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황제의 명령을 받고 스스로 생각해보니, 압록강(鴨綠江) 서쪽 마을에 5개의 성을 쌓아 만드는 것이 어떨까 하여 3월 초에 축성할 곳으로 가서 성 쌓는 공사를 착수할까 합니다. 삼가 요청하건대 〈고려의〉 대왕(大王)께서 미리 지휘하여 안북부(安北府)로부터 압록강 동쪽에 이르기까지 총 280리 사이에 적당한 지역을 돌아다니고 〈성들 사이〉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헤아리게 하시고, 아울러 성을 쌓을 일꾼들을 보내 〈우리 측과〉 같이 시작할 수 있도록 명령하여 주시며, 쌓을 성의 수가 도합 몇 개인지 빨리 회보(回報)하여 주십시오. 귀한 것은 거마(車馬)가 오가며 통함으로써 길이 조공(朝貢)할 수 있는 길을 여는 것과 영원히 우리 조정을 받들어 스스로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甲午)十三年 春二月 蕭孫寧致書曰, “近奉宣命, ‘但以彼國信好早通, 境土相接. 雖以小事大, 固有規儀, 而原始要終, 須存悠久. 若不設於預備, 慮中阻於使人. 遂與彼國相議, 便於要衝路陌, 創築城池者.’ 尋准宣命, 自便斟酌, 擬於鴨江西里, 創築五城, 取三月初, 擬到築城處, 下手修築. 伏請, 大王預先指揮, 從安北府, 至鴨江東, 計二百八十里, 踏行穩便田地, 酌量地里遠近, 幷令築城, 發遣役夫, 同時下手, 其合築城數, 早與回報. 所貴, 交通車馬, 長開貢覲之途, 永奉朝廷, 自協安康之計.”

 

거란(契丹)의 통화(統和) 연호를 처음 사용하였다.

始行契丹統和年號.

 

 

994년 4월,

이 달에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를 거란(契丹)에 보내, 표문(表文)을 받들고 가서 거란의 정삭(正朔)을 행하겠다고 알리고 포로[俘口]의 송환(送還)을 요청하였다.

是月, 遣侍中朴良柔, 奉表如契丹, 告行正朔, 乞還俘口.

 

 

994년 6월,

6월 원욱(元郁)을 송(宋)에 보내 군사를 빌려 작년 〈거란과의〉 전역(戰役)에 대하여 보복할 계획을 알렸다. 송은 북방 국경이 겨우 편안해졌는데 〈군사를〉 가벼이 움직이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면서, 다만 후한 예(禮)만 보이고 돌려보냈다. 이때부터 송과의 외교관계를 끊었다.

六月 遣元郁如宋乞師以報前年之役. 宋以北鄙甫寧, 不宜輕動, 但優禮遣還. 自是, 與宋絶.

 

 

994년 시기 미상,

 

이 해 거란(契丹)이 숭록경(崇祿卿) 소술관(蕭述管)과 어사대부(御史大夫) 이완(李涴) 등을 보내 조서(詔書)를 가져와 안무(按撫)하고 효유(曉諭)하였다.

是歲, 契丹遣崇祿卿蕭述管, 御史大夫李涴等, 齎詔來, 撫諭.

 

사신을 거란(契丹)에 보내 기악(妓樂)를 바쳤으나 〈거란이〉 이를 받지 않았다.

遣使契丹, 進妓樂, 却之.

 

〈성종(成宗)〉 13년(994)에 평장사(平章事) 서희(徐熙)에게 명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여진(女眞)을 쳐서 쫓게 하고, 장흥(長興)·귀화(歸化) 두 진(鎭)과 곽주(郭州)·구주(龜州)에 성을 쌓게 하였다.

十三年 命平章事徐熙, 率兵攻逐女眞, 城長興·歸化二鎭, 及·二州.

 

 

994년은 전후 처리가 한창인 때인 것 같습니다.

고려 측에서는 장흥, 귀화에 진과 곽주, 구주에 성을 쌓게 하였고

거란 측에서도 요충지에 진을 만들어 "조공"할 수 있는 길을 만들자는 것이지요.

거란 측에서는 계속해서 회유하는 조서를 고려에 보내는 등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습니다.

거란이 고려가 보낸 기악(기생과 악공)을 거절한 이유는 알 수 없네요.

 

다만 고려에서는 송나라와 연합하여 거란을 치려고 하는 움직임도 보였는데요,

송나라가 거절하여 외교 관계를 끊었네요. 일부러 도발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요.

 

993년 1차 전쟁이 마무리된 후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습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