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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지의 도서 생활/세지와 고전 읽기

고려사로 미리보기, 1011년(현종 2년)

by 세지_Seji 2023.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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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침공이 시작한 1010년, 왕이 피난을 갈 정도였는데요.

그 다음해는 어떨지 살펴봅시다.

 

 

1011년(현종 2년) 1월 1일,

신해 2년(1011) 봄 정월 을해 초하루 거란주(契丹主)가 개경(開京)에 들어가 태묘(大廟), 궁궐, 민가(民家)를 불살라서 모두 탔다. 이 날 왕은 광주(廣州)에 묵었다.

辛亥二年 春正月 乙亥朔 契丹主入京城, 焚燒太廟·宮闕·民屋皆盡. 是日, 王次廣州.

 

 

1011년 1월 3일,

정축 왕을 호종하던 여러 신하가 하공진(河拱辰) 등이 잡혔다는 것을 듣고 모두 놀라고 두려워 뿔뿔이 도망쳤으며, 오직 시랑(侍郞) 충숙(忠肅), 장연우(張延祐), 채충순(蔡忠順), 주저(周佇), 유종(柳宗), 김응인(金應仁)만이 떠나지 않았다.

丁丑 扈從諸臣, 聞拱辰等被執, 皆驚懼散走, 惟侍郞忠肅·張延祐·蔡忠順·周佇·柳宗·金應仁不去.

 

 

1011년 1월 11일,

을유 거란군[丹兵]이 물러났다.

乙酉 丹兵退.

 

 

1011년 1월 28일,

임인 양규(楊規)와 김숙흥(金叔興)이 거란군(契丹軍)과 싸우다 죽었다.

壬寅 楊規·金叔興與契丹戰死.

 

 

1011년 1월 29일,

계묘 거란주(契丹主)가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물러났다.

癸卯 契丹主渡鴨綠江引去.

 

 

1011년 2월 23일,

정묘 〈왕이〉 개경(開京)으로 돌아와 수창궁(壽昌宮)에 들어갔다.

丁卯 還京都, 入御壽昌宮.

 

 

1011년 4월 22일,

을축 공부낭중(工部郞中) 왕첨(王瞻)을 거란(契丹)에 보내 군대를 돌린 것을 사례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거란에 사신을 보내려고 태사(太史)에 명하여 점을 쳤는데, ‘건지고(乾之蠱)’의 괘가 나오자 〈태사가〉 아뢰기를, “건은 임금이요 아비이므로 건이 튼튼하면 어떤 일도 통하지 않음이 없고, 〈『주역(周易)』에서 건괘의〉 구오(九五)는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는 것이 이롭다.’라고 합니다. 고(蠱)괘는 ‘높은 자가 위에 있고 낮은 자가 아래에 있다.’는 것으로, 이 또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는 형상이므로 길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乙丑 遣工部郞中王瞻如契丹, 謝班師. 先是, 王欲遣使契丹, 命太史筮之, 得乾之蠱, 奏曰, “乾, 爲君爲父, 乾健則無所不通, 九五曰, ‘飛龍在天, 利見大人.’ 蠱之爲卦, 尊者在上, 卑者在下, 此亦以下事上之象, 吉.”

 

 

1011년 8월 24일,

을축 호부시랑(戶部侍郞) 최원신(崔元信)을 거란(契丹)에 보냈다.

乙丑 遣戶部侍郞崔元信, 如契丹.

 

 

1011년 10월 26일,

을축 도관낭중(都官郞中) 김숭의(金崇義)를 거란(契丹)에 보내 동지(冬至)를 하례하였다.

乙丑 遣都官郞中金崇義如契丹, 賀冬至.

 

 

1011년 11월 13일,

11월 임오 형부시랑(刑部侍郞) 김은부(金殷傅)를 거란(契丹)에 보내 생신을 하례하였다.

十一月 壬午 遣刑部侍郞金殷傅如契丹, 賀生辰.

 

 

1011년 12월,

이 달에 거란(契丹)이 하공진(河拱辰)을 죽였다.

是月, 契丹殺河拱辰.

 

 

1011년에는 피난했던 왕이 다시 환궁하였고, 전후 처리를 한 해로 보입니다.

다만, 12월에 거란이 하공진을 죽인 기사를 적은 것이 의아했는데요.

이에 따라서 더 찾아보니 하공진 열전이 있더군요.

하공진을 죽인 부분을 좀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공진 열전 중,

 

 

하공진이 고영기와 함께 거란 진영으로 가서 군대를 철수할 것을 간청하니, 거란 임금이 그것을 허락하였고, 하공진 등을 억류하기로 하였다. 하공진은 억류당했지만, 내심 환국을 도모하면서 겉으로는 충성과 근실함을 보였는데, 거란 임금이 은총과 대우를 심히 더하였다. 하공진이 고영기와 함께 은밀히 모의하고 〈거란 임금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이제 이미 망하였으니, 원하옵건대 저희들이 군사를 이끌고 점검하여 오고자 합니다.”라고 하니, 거란 임금이 허락하였다. 곧이어 〈고려〉 왕이 국도(國都)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거란 임금은〉 고영기를 중경(中京)에 살게 하고, 하공진을 연경(燕京)에 살게 한 후에 양가(良家)의 딸을 배필로 삼아 주었다.
하공진은 좋은 말을 많이 사서 고려로 가는 길[東路]에 차례로 배치해 두었는데, 어떤 자가 그 계획을 보고하였다. 거란 임금이 그를 국문하자 하공진은 상세히 사실대로 대답하고, 또 말하기를, “저는 우리나라를 감히 배반할 수 없습니다.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하나 살아서 대국을 섬기기를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거란 임금이 의롭게 여기고 그를 풀어주면서 절개를 바꿔 충성을 다할 것을 설득하였으나, 하공진의 말투가 더욱 강경하고 불손해지니, 마침내 그를 죽이고 앞 다투어 심장과 간을 꺼내 먹었다.

拱辰與英起, 至契丹營, 乞班師, 契丹主許之, 遂留拱辰等. 拱辰旣被留, 內圖還國, 外示忠勤, 契丹主甚加寵遇. 拱辰與英起密謀奏曰, “本國今已喪亡, 臣等願領兵, 點檢而來.” 契丹主許之. 尋聞王返國, 使英起居中京, 拱辰居燕京, 皆妻以良家女.
拱辰多市駿馬, 列置東路, 以爲歸計, 人告其謀. 契丹主鞫之, 拱辰具以實對, 且曰, “臣於本國, 不敢有二心. 罪當萬死, 不願生事大朝.” 契丹主義而原之, 諭令改節效忠, 拱辰辭益厲不遜, 遂殺之, 爭取心肝食之.
後王下敎錄功, 加其子則忠祿資. 文宗六年, 制曰, “左司郞中河拱辰, 在統和二十八年, 契丹兵入侵, 臨敵忘身, 掉三寸舌, 能却大兵, 可圖形閣上.” 超授其子則忠五品職. 尋又錄其功, 贈尙書工部侍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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