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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지의 도서 생활/세지와 고전 읽기

고려사로 미리보기, 1008~1009년(목종 11년~12년)

by 세지_Seji 2023.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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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과의 전쟁 후 이미 십여 년이 흘렀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무래도 잊혀지고 있겠지요.

하지만 거란 전쟁과는 별개로 궁궐의 암투가 치열한데요,

이번에는 목종의 시해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

 

1009년(목종 12년) 1월,

1월부터 양산의 자루가 부러지거나 궁궐에 화재가 일어나는 등 흉흉한 모습이 포착되었습니다.

 

1009년 1월 16일

왕이 여러 날 몸이 편치 않자 늘 내전(內殿)에만 있으면서 여러 신하를 만나기 싫어하였다. 재신(宰臣)들이 매우 두려워하여 침전(寢殿)에 들어가서 문병하기를 요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왕은 채충순(蔡忠順)·최항(崔沆)과 더불어 몰래 후사(後嗣) 문제를 의논한 후 황보유의(皇甫兪義)를 보내 신혈사(神穴寺)에서 대량원군(大良院君)을 맞아오게 하였다. 서경도순검사(西京都巡檢使) 강조(康兆)가 무장한 병력[甲卒]을 거느리고 도착하여 드디어 왕을 폐위시킬 음모를 꾀하였다.

王累日不豫, 常居於內, 厭見群臣. 宰臣震恐, 請入寢問疾, 不許. 王與蔡忠順·崔沆, 密議立嗣, 遣皇甫兪義, 迎大良院君神穴寺. 西京都巡撿使康兆, 領甲卒而至, 遂謀廢立.

 

 

1009년 2월 2일,

이월 무자 〈강조(康兆)가〉 왕에게 용흥사(龍興寺)나 귀법사(歸法寺)로 나가 있을 것을 요청하였다.

二月 戊子 請王出御龍興·歸法寺.

 

 

1009년 2월 3일,

기축 햇빛이 붉은 장막을 드리운 것과 같았다. 강조(康兆)의 군사들이 궁문(宮門)으로 마구 들어오자, 왕이 모면할 수 없음을 깨닫고 태후(太后)와 함께 목 놓아 울며 법왕사(法王寺)로 출어(出御)하였다. 잠시 후 황보유의(皇甫兪義) 등이 대량원군(大良院君)을 받들고 도착하여 드디어 왕위에 올렸다. 강조는 왕을 폐위시켜 양국공(讓國公)으로 삼고, 군사를 보내 김치양(金致陽) 부자(父子)와 유행간(庾行簡) 등 7인을 죽였다. 왕이 선인문(宣仁門)으로부터 나올 때에 모시는 신하들이 처음에는 모두 걸어가며 따르다가 여기에 이르자 말을 타고 따르는 자가 나타났다. 귀법사(歸法寺)에 도착하자 어의(御衣)를 벗고 음식의 격식을 낮추어 올렸다. 강조가 최항(崔沆) 등을 불러 관직을 나누어주자, 왕이 최항에게 이르기를, “요즈음 부고(府庫)에 화재가 일어났는데도 〈경계를 게을리 하여〉 변란이 갑자기 일어났으니, 모두 내가 덕이 없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다시 무엇을 원망하겠는가? 다만 바라는 것은 시골로 돌아가 늙는 것이니 그대는 새 임금에게 이 뜻을 아뢰고 잘 보좌(輔佐)하도록 하라.”라고 하고 드디어 충주(忠州)로 향하였다. 태후가 밥을 먹고자 하면 왕이 몸소 소반(小盤)과 사발을 받들었고, 태후가 말을 타고자 하면 왕이 친히 말고삐를 잡았다. 가다가 적성현(積城縣)에 이르자 강조가 사람을 시켜 그를 죽인 후 왕이 자결하였다고 보고하였으며, 〈시신은〉 문짝을 취하여 만든 관에 넣어 객관(客館)에 임시로 안치하였다. 왕은 왕위에 있는 지 12년이었고 나이는 30세였다.
성품이 침착하고 굳세어 어려서부터 임금의 도량이 있었고 궁술(弓術)과 기마(騎馬)를 잘 하였다. 술을 즐기고 사냥을 좋아하여 정사(政事)에 뜻을 두지 않았고, 총애하는 자들[嬖倖]만 믿고 가까이하다가 화(禍)를 당하였다. 한 달을 넘겨 적성현의 남쪽에서 화장(火葬)하고 능호(陵號)를 일러 공릉(恭陵)이라 하였으며, 시호(諡號)를 선령(宣靈), 묘호(廟號)를 민종(愍宗)이라 하였는데 모두 강조가 찬정(撰定)한 것이다.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통분(痛憤)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현종(顯宗)만 알지 못하다가 거란(契丹)이 죄를 물을 때에야 비로소 이를 알게 되었다. 현종 3년(1012)에 도성(都城)의 동쪽으로 무덤을 옮기고 능호를 고쳐 의릉(義陵)이라 하였으며, 시호를 선양(宣讓), 묘호를 목종(穆宗)이라 하였다. 같은 왕 5년(1014)에 시호에 효사(孝思)를 더하고, 18년(1027)에 위혜(威惠)를 더하였으며, 문종(文宗) 10년(1056)에 극영(克英)을 덧붙이고, 고종(高宗) 40년(1253)에 정공(靖恭)을 더하였다.

己丑 日色如張紅幕. 兆兵闌入宮門, 王知不免, 與太后號泣, 出御法王寺. 俄而, 兪義等奉院君而至, 遂卽位. 廢王爲讓國公, 遣兵殺金致陽父子及庾行簡等七人. 王出自宣仁門, 侍臣初皆步從, 至是, 始有騎而從者. 至歸法寺, 解御衣, 換食而進. 召還等供職, 王謂曰, “頃府庫災而變起所忽, 皆由予不德, 夫復何怨? 但願歸老于鄕, 卿可奏新君, 且善輔佐.” 遂向忠州. 太后欲食, 王親奉盤盂, 太后欲御馬, 王親執鞚. 行至積城縣, 使人弑之, 以王自刎聞, 取門扇爲棺, 權厝于館, 王在位十二年, 壽三十.

性沈毅, 少有人君之度. 善射御. 嗜酒好獵, 不留意政事, 信狎嬖倖, 以及於禍. 踰月, 火葬縣南, 陵曰恭陵, 謚宣靈, 廟號愍宗, 皆康兆所撰定. 臣民莫不痛憤, 而顯宗未之知, 至契丹問罪, 始知之. 顯宗三年, 移葬城東, 改陵曰義, 謚曰宣讓, 廟號穆宗. 五年, 加謚孝思, 十八年, 加威惠, 文宗十年, 加克英, 高宗四十年, 加靖恭.

 

 

이로써 목종은 폐위되고 그 다음으로 현종이 즉위하게 됩니다.

거란와의 전쟁,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현종의 즉위년은 따로 다루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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