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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처리2

고려사로 고려거란전쟁 미리보기, 1020년(현종 11년) 귀주대첩의 승리로 이끈 1019년, 전후 처리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보고, 고려거란전쟁 편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1020년(현종 11년) 2월, 이 달에 이작인(李作仁)이 표문(表文)을 받들고 거란(契丹)에 가서 번국(藩國)이라 칭하며 공물(貢物) 바치기를 예전처럼 할 것을 청하고, 또 구속되어 있던 거란인(契丹人) 지라리(只刺[剌]里)를 돌려보낼 것을 (알렸는데, 그는) 억류된 지 무려 6년이었다. 是月, 遣李作仁奉表如契丹, 請稱藩納貢如故, 且歸所拘人只刺里, 被留凡六年. 1020년 3월 2일, 3월 계축 거란(契丹)의 사신 야율행평(耶律行平)을 돌려보냈다. 三月 癸丑 歸契丹使耶律行平. 1020년 3월 8일, 기미 거란(契丹)에서 사신 검교사도(檢校司徒) 한소옹(韓紹雍)이 왔다. 己未 契丹使檢校司徒.. 2023. 11. 20.
고려사로 내용 살피기 (2) 994년 어제 993년(성종 12년) 고려사의 거란 전쟁 부분을 살펴보았는데요, 서희의 열전에 나온 형태처럼 큰 피해 없이 마무리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다음해에는 어떻게 거란과의 관계가 지속되었을까요? 994년(성종 13년) 2월, 〈갑오〉13년(994) 봄 2월 소손녕(蕭遜寧)이 글을 보내 이르기를, “요즈음 받든 우리 황제의 명령[宣命]에 말씀하시길, ‘다만 고려(高麗)와는 좋은 우호관계가 일찍부터 통하였고 국경이 서로 맞닿았다. 비록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김(事大)에 진실로 합당한 규범과 의례가 있지만, 그 처음과 끝을 살펴본다면 모름지기 오래도록 〈우호관계를〉 남겨야 한다. 만약 미리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사신의 〈길이〉 도중에 막힐까 걱정이다. 따라서 고려와 서로 상의하여 길의 요충지에 성곽과.. 2023.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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